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사코 황후/결혼 전 (문단 편집) == [[하버드 대학교]] 졸업 및 [[외교관]] 시험 합격 == || [[파일:1442553644.jpg|width=100%]] || || [[여고생]] 시절의 사진. || 마사코가 고1이던 [[1979년]], 아버지는 다시 주미일본대사관으로 발령을 받아, 오와다 일가는 미국으로 이주했다. 마사코는 [[매사추세츠주]] [[보스턴]] 시립 벨몬트(Belmont) 고등학교 1학년[* 미국 학제의 10학년]으로 [[편입학]]했다. 고등학교에서도 [[합창]]ㆍ[[수학]]ㆍ[[소프트볼]] 등 여러 [[동아리]] 활동을 활발하게 했으며, [[미국인]] 학생들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여러 명문 대학에 합격했으며, 마사코는 그중에서 '''[[하버드 대학교]]'''에 진학해 [[경제학]]을 전공했다. 마사코는 대학 [[기숙사]]에 살며 학업과 여러 활동들을 열심히 하였으며, 국제 무대에서 일할 꿈을 가지고자 그녀는 중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[[1983년]] [[프랑스]] [[그르노블 알프 대학교]]로 건너가 그곳에서 [[프랑스어|프랑스학]]을 공부했고, 이후 [[독일어]], [[스페인어]] 등 다양한 외국어도 공부했다. 그리고 [[1985년]] [[6월]], 우수한 성적으로 [[하버드대학교]]를 졸업하였다. 마사코의 졸업논문의 제목은 <수입 가격 쇼크에 대비한 국제 간 조정>[* 당시 졸업논문 지도교수가 [[제프리 삭스]]였다.]이었는데, 이 논문은 나중에 [[일본 외무성|외무성]]의 참고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. [[미국]]에서 좋은 기회가 많았지만, 어린 시절의 많은 기간을 외국에서 자라난 마사코는 그 기회를 뒤로 한 채, '''[[일본]]을 더 잘 알아 정체성을 찾고 싶어서 귀국'''했다. ~~그러나 이 결정은 자충수가 되었다.~~ || [[파일:attachment/마사코 황태자비/harvard.jpg|width=100%]] || || [[하버드 대학교]] 졸업식에서.[* 이때는 살을 빼기 전으로, [[외무고시]]를 합격한 뒤 살을 빼면서 본격적으로 미모가 드러났다.] || 마사코는 하버드대학 시절 만난 외국 대학 출신 여성으로서 최초로 [[외교관]]이 된 무라즈미 미에[* 외교관 무라즈미 야스시의 딸이다.]의 이야기에 자극을 받아, '일본 내에서 국제적인 일을 하면서 여성차별이 없는 영역에서 일하기 위해 외무성에 들어가야겠다'고 생각했고, 1986년 4월 도쿄대학 법학부 학사편입 후 '''[[국가공무원채용종합직시험|외무공무원 상급채용 1종시험]]을 준비, [[1986년]] 10월 단번에 합격'''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[[일본 외무성|외무성]]에 입성하게 되었다. 당시 3명뿐이던 여성 합격자 중 1명이자 '''부녀(父女) [[외교관]]'''의 탄생으로 일본 내에서 화제가 되었다. 언론과의 인터뷰에서, 마사코는 "외교관을 지망한 이유"에 대해 딱 부러지게 대답하였다. >'''[[외교관]]이 된 이유는, [[일본]]에서도 남녀가 차별을 받지 않고 동등하게 일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. 저는 일본을 남녀차별이 없는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!!'''[* 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러한 일본 내에서의 남녀차별에 따른 피해를 제일 심하게 받았다.] 또한 해당 인터뷰에서 마사코는 "결혼 후에도 외교관으로 활동하고 싶다", "가정과 일을 양립하고 싶지만, 그게 어렵다면 일을 택하고 싶다"고 밝혔다. || [[파일:attachment/마사코 황태자비/owada7.jpg|width=100%]] || || [[파일:external/828973f737186e0a794c335768e1bc751c9ad757b57871b38c15eee29bb08272.jpg|width=100%]] || || [[외교관]]으로 활동하던 당시. || || [[파일:마사코 코트.jpg|width=100%]] || 보수적인 황실 입성 이후의 촌스러운 패션과 달리, 이때 마사코의 패션은 잡지 사진이 일대 붐을 일으킬 정도로 세련되었다. 1987년 도쿄대학을 중퇴하고 외무성에 입성한 마사코는 경제국 국제기관2과에 배속되어 근무한다. 1988년에는 [[영국]] [[옥스퍼드 대학교]] [[옥스퍼드 대학교/컬리지 #s-5.2|베일리올 칼리지]]로 연수를 떠나 국제관계학을 1년간 공부[* 이때는 이미 "오와다 마사코가 [[나루히토]] 친왕의 유력한 신붓감 후보라더라"라는 소문이 퍼져 있던 상태라, 일본 기자들이 취재하러 [[옥스퍼드 대학교]]로 쳐들어오기까지 했다고 한다. 이때 마사코는 정중하게 "나루히토 친왕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"라고 밝히며 기자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.]했다. 동년의 제16차 G7 서밋에 반도체 시장 관련 통역으로 참여하였다. [[1990년]] 6월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는 북미국 북미2과에 배속되어 [[OECD]] 담당[* 이때 아버지 히사시는 주[[OECD]] 대사였다.]으로 1년 4개월간 근무하였다. 1991년에는 미일무역회의[* 당시 반도체를 두고 [[미국]]과 [[일본]] 사이에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. 그 결과가 [[미일 반도체 협정]].]에 통역으로 참여했다.[* 이때 마사코가 상당히 활약하여서, 당시 일본측 고위 담당자가 마사코에 대해 여러가지로 물어보는 장면이 방송되기까지 했다.] 동년 1991년 3월 [[스웨덴 총리]] 국빈방문 당시 만찬회 통역 담당, 같은달 11일 [[일본]]에서 열린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도 통역으로 참여하는 등, 마사코는 외무성에서 촉망받는 [[외교관]]이었고 능력도 높이 평가받았다. 마사코는 [[영어]]를 비롯하여 [[러시아어]], [[프랑스어]], [[독일어]], [[중국어]], [[스페인어]] 7개국어를 수준급 이상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. 또한 외교관 아버지를 둔 덕에 일천한 경력에도 외교관으로서의 행동양식에도 능숙했다. 마사코에 대해 '아버지의 후광을 힘입은 무능한 사람'이라는 악평은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었다고 한다. 즉 만약 아버지가 외교관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마사코는 충분히 훌륭한 외교관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, 다른 외교관 선배들이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어느 누구도 마사코의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. '''그런데…'''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